삶의 흔적들과 한자리에

김해주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래된 단독주택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있다. 1970년에 지어진 작은 이층집이다. 집주인 부부는 한국에서 태어난 대만 사람들인데 7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줄곧 이 집에서 신혼을 보내고, 아이 둘을낳고, 네명의 손자, 손녀를 키우다 얼마 전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몇번의 수리를 거친 흔적이 있긴 하지만 한국집의 나이로 중년을 훌쩍 넘긴 이 집은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다. 재건축을 기대하며 더 이상의 집수리를 포기한 집주인의 도움 없이 열흘이 넘도록 이곳저곳을 손보고 있는데 천정이나 지붕 위처럼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겁이 나서 감히 뜯어볼 엄두를 내지 못한 곳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으나 아직도 한국말이 서툰 노부부는 집안 곳곳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과장을 보태 거의 유에프오만한 위성접시가 대문 위에 떠억 버티고 서서 그 당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고, 현관과 싱크대 여기저기 빨간색 종이에 금박으로 쓴 복, 입춘대길 등의 한자가 차압딱지 마냥 붙어 있다.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스티커들을 보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시간의 겹이라는 은유를 벽지의 겹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번에 발견했다. 꽃줄기가 수직으로 뻗어 있는 실크벽지를 벗기자, 누런 합지가, 그 아래 다시 아라비아 문양 같은 갈색 벽지가 그리고 또 다시 1985년의 신문지가 나온다. 시멘트벽까지의 세월을 거슬러가기엔 너무나 깊고 멀다.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에 길게 꺼낸 것은 서대문구 재활용센터에서 열린 <세탁기 장식장>이라는 전시가 이 오래된 집을 계약하며 이사를 준비하는 나의 경험과 맞물려 남다른 관심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활의 일부이자 삶과 추억이 배어있는 물건들이 모여드는 곳. 재활용센터라는 특수한 공간은 시간과 기억, 다툼과 애정이 배어든 낡은 집과 뗄 수 없는 짝인 것만 같다.나이든집을대하다보면체력은 다하였으나 삶의 경험으로 노련해진 노인을 대하는 것 같은 연민과 경외가 생겨난다. 그래서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벽지를 바꾸는 일에도 두 번 생각이 필요하다. 원래의 모습에 대해 존중하고 싶고, 조금은 세월의 흔적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보톡스 시술보다는 아무래도 주름 결을 예쁘게 살려주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재활용센터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전시를 펼친 <세탁기 장식장>의 작가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엿보였다. 작품으로 공간을 제압하지 않고, 그곳의 환경과 놓인 사물들을 존중하면서 물건에 배인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읽어보려 노력하는 것 말이다.

이 전시는 작가들(이소영, 구민자, 박형지, 이성휘)이 기획자로 팀을 꾸려 동료 작가들을 초청하고 직접 작업도 진행한 전시이다. 발단은 이소영, 구민자 작가가 작년 어느 날 강남의 대로변을 걷다가 우연히 그 동네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재활용센터를 발견한 것부터 라고 한다. 재활용센터에 쌓인 독특한 물건들과 그 배치를 유심히 보다보니 그것이 이미 하나의 설치미술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 그곳에서 전시를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다. 한참 지나 다시 찾아 간 바로 그 재활용센터는 사라졌지만 서대문구에 있는 재활용센터의 협조를 얻게 되어 지난 6월 중순부터 열흘간의 전시를 만들게 되었다. 전시는 재활용 센터의 일상과 맞물려 돌아갔다. 작품을 보는 시간은 재활용센터의 운영시간이고,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물건이 들고 나는 그곳의 영업은 지속되었다. 설치된 작품들은 빈 공간을 사용하기도 하고 재활용품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언제든지 물건들이 팔려나가고 들어오는지라 전시장의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작품들은 이러한 공간의 특수성을 활용하거나 공간의 운용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자기 자리를 잡을 수 있어야 했다. 모양도 각기 제각각인데다 다소 유행에도 떨어진 가구들의 집합은 하얀 갤러리처럼 작품에만 집중해 감상할 수 있는 환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미 재활용센터라는 공간이 작품 성격의 반을 결정하고 나머지 작품은 공간에 대한 질문 혹은 대답으로서의 작가의 ‘개입’에 가까웠다. 각각이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선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닌 적정선을 찾아 사이좋게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또한 갤러리나 미술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서울의 변두리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시인지라 전시 관람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아드는 사람들도 친절하게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했다. 우연히 재활용센터에 방문했다가 물건들 사이에 자리 잡은 작품들을 마주하고 예기치 않은 사건에 미소 지을 누군가의 순간들을 위해, 전시는 어깨 힘을 빼고 소박함과 친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간 성격이 워낙 강한 이 전시에서 작품이 틈입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먼저 작품이 풍경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공간의 풍경과 사물들이 만들어 내는 연상들에 주목하여 그것을 해석하는 작품을 만들되, 그것을 감싸서 가리지 않고 겸손하게 그 음영이 되어 주는 것이다. 권경환 작가의 설치 <짐>은 가구들의 숲인 재활용센터의 모습을 도시의 숲으로 해석했다. 높고 낮은 가구들이 쌓여 있는 모습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상상한 작가는 구체적인 도시의 표지들을 가구 위에 뚜껑처럼 얹어 주었다. 장식장 위에는 병원의 십자 표시와 교회의 십자 첨탑이 올라가고, 서랍장 위에는 옥탑 방이, 높은 옷장 위에는 철골의 광고판이 얹어졌다. 작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설치물들은 도시의 그것처럼 눈에 띄는 색채 대신 오래전의 풍경 사진에서 오려낸 것과 같은 색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표지들에 ‘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건물들에 얹어진 그 용도와 역할이 각각에게는 버거운 도시적 삶의 짐을 연상시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구민자 작가의 작업은 재활용 가구들의 그림자이다. 가정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누런 장판에 공들여 나무의 결을 새긴 <화학적 나무>는 나무 모양을 흉내 내어 필름을 덧씌운 식탁과 가구들의 발꿈치에 그림자 형태로 붙어 누워 있다. 나무이길 바랐던 가구의 욕망, 실은 나무로 된 가구를 소유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뒤집어 강조한 것이 꼼꼼한 수공으로 남았다. 나무 아닌 나무가 없는 것처럼 무늬 있는 그림자는 원래 없다. 무늬 새긴 그림자가 따라옴으로서 나무를 흉내 낸 나무는 존재 가능한 사물이 되었다. 재활용 사물에 배어 있는 추억과 이야기에 주목하는 작품들은 언뜻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위치에, 공들여 찾아야 발견할 수 있는 보물찾기와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박형지 작가는 가구들 사이사이에 <옷장을 옮기다 잃어버린 ‘빙하’를 발견하다>라는 제목의 그림들을 숨겨 놓았다. 물건들이 켜켜이 쌓인 공간에서는 아무리 색색의 그림이라 해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는 무심코 바퀴 달린 가구를 밀거나, 물건과 물건 사이 바닥의 빈 공간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예상치 않게 그림을 발견하게 되길 기대했다. 이사를 하다가 장롱 밑에서 느닷없는 물건을 발견하는 것 같은 순수한 놀라움과 즐거움의 순간들이다. 남극의 빙하나, 이과수 폭포 그리고 마추픽추와 같이 지구 반대편의 이국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의 풍경들이 이곳저곳에 숨은 채 의외의 발견과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이우성 작가의 <피노키오 책상>은 원래 그 물건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던 것만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작품인지 알 수 없다. 한참 유행하던 아동용 책상의 유리 상판 아래에 만화의 컷을 오려 끼워 넣은 것으로, 각각의 그림 속에 가족의 기억들과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권자연 작가의 <보물찾기>는 적극적으로 재활용센터를 놀이의 공간이자 추억의 공간으로 바꾼다. 쓸만한 물건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찾기일 수밖에 없는 이 곳 공간의 특성을 어린 시절의 놀이와 연결했다. 물건을 고르러 온 사람들이 무심코 서랍을 열거나, 장롱 문을 열었다가 딱지 모양으로 접힌 보물 쪽지를 발견하게 되면, 노트, 볼펜, 스티커와 같은 문구류나 꽃씨 등의 소박하고 정겨운 선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재활용품을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소영의 <제 2의 보금자리>는 한 무더기의 텔레비전 모니터들로 재구성한 동물원이다. 재활용을 위해 층층이 자리를 잡은 모니터에는 사자, 원숭이, 얼룩말, 부엉이와 같은 동물의 영상이 각각 하나의 우리처럼 들어서 있다. 각각의 동떨어진 공간에 살던 물건들이 한곳에 임시로 자리를 잡고 다음의 기약 없는 행로를 기다리는 것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동물들이 한 곳에 모여 하릴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동물원의 풍경과 겹쳐진다. 이소영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은 재활용품을 활용한 것이자, 재활용품을 위한 작업이다. 인근 홍제천 인공폭포와 분수쇼를 찍은 영상, <이보다 더 좋을수는없다>는 발길이 드문 지하의 벽에 가로로 길게 상영되었고, 관객 없는 상영관마냥 의자들이 그 앞에 가득 들어차 있다. 도시의 인공폭포는 자체의 물을 순환시켜 재활용된다고 한다. 그 가공적 역할은 이곳에 들어찬 주인 없는 빈 의자의 용도와도 통한다. 그런 한편 폭포의 떨어지는 물줄기는 인공적 태생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곳 지하 소외된 공간, 풀이 죽은 사물들에게는 생명력과 활기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마치 재활용 가구들을 위한 휴가지의 모습이라고 할까. 한상혁의 <문을 닫으면 불이 꺼집니다>는 기존의 가구 안쪽에 조명을 설치한 작품이다. 말을 걸면
입을 다무는 소심한 성격의 사람처럼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불이 켜져 있지만, 누군가 문을 열면 자동으로 불이 꺼진다. 원동화 작가의 작품들도 사물들에 대한 의인화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지내온 무엇들>은 의자에 나 있는 조그마한 상처들을 위로하고 그 기억을 지워주기 위해 보드라운 흰색 양모를 씌운 작품이고, <움직이는 사물들>은 가구들 위에 빨간색 드로잉이 그려진 흰 천을 씌운 작업으로 열이 나서 우산을 쓰고 있는 냉장고나, 의자에 앉아 있는 텔레비전, 신발을 신고 있는 의자처럼 사물의 성격이나 성질을 사람에 덧대어 아기자기한 그림들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권용주 작가는 재활용센터의 풍경이나 그곳에 놓인 사물의 사용을 넘어 재활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시골 마을 초입에 놓여있어야할 듯한 ‘바르게살자’ 라고 새겨진 바위덩어리, 정치적 판단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한보수정당의나무간판은주소를잘못찾은물건처럼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책상이나 의자처럼 소박하고 일상적인 용도의 물건들에 비해 이념과 주장을 보조하던 이토록 모호한 정체성의 사물들은 그 재활용이 요원해 보인다. 이미 길에서 수집한 사물을 산처럼 쌓는 설치 작업을 했던 작가가 ‘재활용’과 사물을 연결하는 대신 개념과 ‘재활용’을 연결한 것이 흥미롭다.

이 전시는 개별 작품들의 미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작가들이 쉽지 않은 공간에 개입하여 재활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전시 서문에 쓰인 것처럼 “각 물건이 보유하고 있는 역사와 기억을 되짚어 물건의 구매가 단순한 소비가 아닌 감성적 소통으로 연결되는 재활용 상품의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물물교환이나 보물찾기처럼 사고파는 것과는 다른 소비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하고 고가의 사치품과는 차별되는 가치, 즉 서민들의 추억과 기억을 어떻게 부각시킬 수 있을지에 집중하기도 한다. 한편, 작가들이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하면서 드나드는 물건들과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것은 이곳에 모여드는 개별적 삶의 집합인 특정 커뮤니티를 관찰하는 계기도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미 재활용센터라는 공간을 사용함으로써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하게 되었지만 발굴의 현장으로서의 재활용센터의 가능성도 열어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무 공간 밀집한 강남의 재활용센터에 모여드는 물건은 서민들의 거주공간이 많은 서대문구의 재활용센터의 물건들과는 사뭇 다른 구성으로, 다른 형태의 삶들의 음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삶을 한 번 거쳐 온 물건들이라는 점에서 재활용센터는 도시의 생태지형을 그려내는 출발점이자, 반경에 있는 각각의 커뮤니티를 이해할 수 있는 고고학적 사이트가 될 수도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전시가 끝나자마자 이내 재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작가들은 이 전시에 나왔던 작품들과 몇 개월간 이곳을 드나들며 구상한 각자의 아이디어, 작업을 구체화 시키는 과정, 그리고 전시 진행의 기록들을 모아 판교생태학습원에서 전시하고 있다. 재활용센터에서의 지극히 장소특정적인 전시는 장소를 옮긴 다른 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전시를 재활용한다는 것은 전시의 재료를 정리한 아카이브로서 기능하는 방식과 달라진 환경에서 재 맥락화 되어 새로운 용도와 개념을 부여 받게 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각각 기능하거나 또 병행될 수 있다. 완결 형태로서의 전시가 여러 미술관들을 돌며 반복 전시되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장소 특정적인 성격의 전시의 경우, 그것이 다시 재생되는 것은 그것이 아카이브가 아니라면, 반드시 재 맥락화를 수반하게 된다. 재활용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사물들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다시 놓일 때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이곳에 잠시 모였던 재활용품들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로운 삶의 경험을 덧입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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