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오후의 재활용센터
이성휘
서대문구 재활용센터의 1, 2층을 오르내리는 리프트 너머로 홍제천의 물소리가 시원한 6월의 오후. 한낮의 바람을 찾아 리프트 곁을 서성이자 홍제천의 물소리에 섞여 구석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6월의 햇살에 시간조차 늘어지는 때, 짧은 동요를 반복하는 휘파람 소리는 주변의 소음과 함께 적당히 섞여 공중으로 흩어진다.
물소리를 뒤로 하고 다닥다닥 진열되어 있는 가구들 사이를 지나 철제 진열대 위에 놓인 여러 대의 묵직한 은색 텔레비전 화면 속 동물들에 시선이 간다. 맹수의 본성을 잃은 듯 축 늘어져 꼼짝도 안하는 사자, 벽을 향해 영원히 그대로 서 있는 듯한 얼룩말, 그리고 거대한 뿔이 버겁게 보이기만 하는 큰뿔소가 보인다. 조금 더 지켜보니 영상 안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코끼리와 아프리카 포큐파인 그리고 망토원숭이까지 있다. 한여름 태양 아래 부동 자세로 있던 펭귄들이 사육사가 던져주는 먹이를 보고 한꺼번에 물속으로 첨벙 하는 광경은 낯설기까지 하다. 본래의 서식지에서 동물원으로 옮겨진 동물들은 빛바랜 화면조정띠만큼이나 자연의 선명한 생명력을 잃은 것 같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사러 온 고객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동물들의 나른한 한때일 뿐이다.
바람에 살짝 식탁보가 나풀거리고 있는 묵직한 나무 식탁 앞에 앉아본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드럼 세탁기는 지금 로케트로 변신 중이다. 그러고보니 어릴 적에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인형이 살아 돌아다닌다든지, 물건이 움직인다든지 하는 공상을 해본 적이 있지 않던가? 가족들이 모두 잠자고 있을 때 세탁기는 로케트로 변신하고, 밤새 켜 있는 텔레비전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이때만큼은 사물이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낮이 되면 이들은 숨을 꾹 참고 정지한 채로 인간 세계의 주변부로 돌아간다. 그래서 기둥 옆 하얀 솜털의자는 한마리 곰처럼 푸근하고 친근해 보이지만 하얀 솜털은 의자의 모든 상처와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다. 잔인함은 이렇게 따뜻함으로 위장될 수도 있다.
어느새 발길은 서랍장과 장농들이 밀집되어 있는 재활용센터의 다른 편으로 향한다. 도시의 한 구역을 걷는 기분이 들도록 가구들의 꼭대기에는 뾰족한 교회 첨탑이, 안테나가 매달린 옥탑방이, 그리고 물탱크가 있다. 그리하여 잠시 빌딩 숲을 거니는 거인이 된다. 꼭꼭 닫혀 있는 삭막한 도시의 거리를 연상한다. 작은 가구에서부터 광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드는 것들은 집적이라는 양상을 통해
서로 닮아 있다.
집적된 거시 세계에는 인간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켜켜히 숨어 있음을 안다. 몇 개의 가구 문과 서랍을 열어보다가 드디어 쪽지 하나를 찾았다. 순간 연서를 펴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어느 새벽엔가 누군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고이 접힌 쪽지가 만들어진 그 새벽의 시간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미처 발견되지 못한 쪽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 쪽지를 발견하게 될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한층 위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서 비닐 장판 위에 놓인 테이블 세트를 발견한다. 흔히 모노륨이라 불리는 비닐 장판 표면에는 가구의 그림자 모양을 따라서 나뭇결이 새겨져 있다. 나뭇결은 본디 가구의 것이어야 하지만 오래전부터 싸구려시트지가그흉내를내고있으며우리는이러한것에 무감각하다. 사물의 본질이 값싼 눈속임으로 쉽게 위장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구의 숙명이 이동이라고 하면 우스운 말이 될까? 어느날 집으로 배달되어진 가구는 무던하게도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지만, 거주처를 옮기는 인간의 행사를 피할 수 없다. 이사하는날우리는옷장아래서,또는책장뒤에서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잠시 기억 저편의 시공간으로 가서 가구가 내어준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가구를 사러 온 사람들은 문을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보고 속안까지 꼼꼼하게 살핀다. 한때 누군가의 옷으로, 책으로, 아기자기한 수집품들로 채워져 있었을 이 가구들은 이제는 텅 비어 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는 장이 눈에 들어오고, 호기심에 문을 연 순간 빛은 순식간에 점멸한다. “문이 닫히면 불이 켜집니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빛. 그러나 분명 내부를 가득 채웠던 빛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고, 수차례 다시 문을 열고 닫으며 그 빛을 확인하려는 관람객의 욕심처럼, 우리는 덧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산다.
정치는가구안을가득채웠던빛처럼우리사회를가득 채우고 있지만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재활용센터 3층의 철제 빔에걸려있는모정당의현판은키높은가구들에가려져 쉬이눈에띠지않는다.이정당명칭은정당쇄신을이유로 이제 역사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 정당들의 쇄신 방식은 당명 교체만을 일삼는, 끝없는 자기 재활용이지 않던가. 자기 재활용을 통한 생존 방식은 사회운동을 펼치는 단체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단체들은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새로운 활동과 구호를 내세우지만 겉모습을 바꾼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과거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계속 생존하는 방식이다.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것에까지, 그리고 정치적인 영역에까지 우리의 삶의 조건은 끊임없이 재활용되고 있다. 서대문구 재활용센터에서 열린 전시 <세탁기 장식장>의 작가들은 이 재활용이라는 개념을 사물에 대한 경험이나 사적인 추억 등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 삶의 조건을 관조하는 매개로써 활용했다. 바로 말초적인 만족으로 인해 우리가 간과하는것,아니아예인지하지못하는것,그런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재활용센터 건물을 나와 한낮의 홍제천변을 걷다가 ‘인공’ 폭포 앞에서 멈춘다. 시원한 물소리는 또 하나의 만족.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